비빔밥
비빔밥

뒤늦은 비빔밥 예찬– 단순한 음식에 깃든 삶의 향기, 믿음, 변화의 이야기


1. 나와 비빔밥의 거리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누군가가 물으면 나는 언제나 “우동이요.”라고 대답해왔다.
면 요리를 좋아하는 나는 외식 자리에서 밥을 굳이 선택하지 않는다. 식당 메뉴에 면이 없다면, 밥 종류를 겨우 고르더라도 비빔밥은 손이 잘 가지 않는 편이었다.

가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비빔밥을 먹게 되면, 나는 꼭 나물과 밥을 따로 덜어 먹었다. 고추장도, 참기름도 넣지 않은 채로. 주변에서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느껴졌지만 나에게 비빔밥은 특색 없는 평균값의 음식이었다.

나물의 조합이 조금씩 다르다지만, 기본적인 맛의 틀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 여겼다. 섞으면 섞을수록 각 재료의 개성은 사라지고 ‘그저 그런 맛’이 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비빔밥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 별 감흥 없는 음식이었다.
그러던 나에게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왔다.


2. 유럽에서의 시간, 그리고 허기

24년 만에 떠난 유럽 가족여행. 설렘도 컸지만, 여정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예약한 차량은 예상과 달리 수동 기어였다. 익숙지 않은 운전 감각을 되살리느라 남편은 긴장했고, 길은 자주 막히거나 공사 중이었다.

하루의 계획을 다 마치기 위해 식사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아침은 든든히 먹더라도, 점심은 대개 차 안에서 빵이나 과일로 때웠다. 저녁은 슈퍼에서 샐러드를 사거나 가끔 스파게티를 먹었다. 한국 음식은 말 그대로 '사치'였다.

어느 날, 한국 식당이 있는 도시를 지나며 들러볼까 제안했지만 큰아이는 "기대에 못 미칠 것 같다"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매일, 역사적인 장소를 돌아다니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또 걸었다.
식사는 점점 생존을 위한 행위처럼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속은 점점 허해지고 있었다.
단지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익숙한 맛, 익숙한 식탁, 함께 나누는 온기.
그 모든 것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3. 마지막 날, 프랑크푸르트의 한인교회

여행의 마지막,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한인교회를 찾았다.
사실,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해 교회를 찾아 헤매다 도착한 시간은 예배 시작 10분 후였다.

하지만 20년 전 함께했던 교우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춘 듯했다.
“그때 아이들이 지금 제 아이들 나이였네요.”
사모님의 한마디에 모두 웃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교회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로 든든히 서 있었다.

성만찬 예식을 마친 뒤, 지하 친교실로 내려가 식사 자리에 앉았다.
그날의 식사는... 비빔밥이었다.


4. 비빔밥 한 그릇에 담긴 것들

“많이 드세요.”
교우들께서 정성스레 수북이 담아 주신 비빔밥 그릇이 앞에 놓였다.
한국이었다면 “밥을 조금만 주세요”라고 말했겠지만,
그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그릇을 그냥 받았다.

고명으로 올라간 나물과 달걀, 고추장, 참기름.
무심코 한 입을 떴는데, 그 고소함과 풍미에 멈춰 섰다.
참기름의 향이 이렇게 가슴을 데우는 것이었나?
달콤하고 짭짤한 묵은지, 단무지도 너무 맛있게 느껴졌다.

아이들도 놀라울 정도로 잘 먹었다.
큰아이는 “묵은지 진짜 맛있어요.”라고 했고,
독일에서 태어나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던 둘째는
“여기서 교회 다닐 때 놀다가 점심 먹은 거 기억나요.”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맛이 단지 배고파서 그런 걸까? 아니면…


5. 여행의 끝, 비행기의 비빔밥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나왔다.
나는 주저 없이 참기름을 넣고 섞었다.
늘 냄새가 싫다며 멀리하던 참기름이, 이번만큼은 정말 고소하게 느껴졌다.

남편은 뒤늦게 참기름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아쉬워했다.
“지금은 매운 게 더 땡기네.”라며 고추장만 넣었다.
그 말에 문득 생각했다.
우리의 기호, 취향은 언제 어떻게 바뀌는 걸까?
입맛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황과 형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6. 음식, 기호, 그리고 마음의 변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한다.
세상의 것들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는 경험.
기호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마음의 중심이 바뀐 것이다.

어쩌면 음식 취향도 비슷한 이치인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해왔던 것들 중 상당수는,
시간과 경험, 만남, 상황 속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7. “그 즉시 버리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어부들을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은 그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그 순간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다.

변화의 계기는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아주 작은 일, 아주 사소한 깨달음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나에게는, 그 변화의 순간이 비빔밥 한 그릇이었을지 모른다.


8. 한 그릇에 담긴 인생

비빔밥은 여러 가지 재료가 섞인 음식이다.
나물, 고기, 계란, 밥, 고추장, 참기름…
각 재료는 모두 다른 맛을 가지고 있지만, 섞으면 전혀 다른 조화를 이룬다.

그 조화는 때로 예상치 못한 맛을 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반가운 맛이 된다.

이제 나는 안다.
비빔밥은 특색 없는 음식이 아니라,
‘어울림’과 ‘섞임’을 통해 그날의 맛을 완성하는 음식이다.

그 안에는 기억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9. 이제 묻는다면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이제 나는 “비빔밥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왜냐고요?
그건 그날, 그곳에서
내 삶이 다시 섞이고, 다시 채워지고,
다시 향기롭게 익어간 맛이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혹시, 그 좋아함 속에도… 변화를 이끄는 기억의 힘이 담겨 있지는 않으신가요?